▲ 전 도의원 문정섭올해는 6·25가 일어난지 61주년 회갑이 되는 해다. 필자는 당시 4살이었고 함양읍 죽림리 내곡마을 현 동사가 있는 도로변에서 살았다.이날은 북한 인민군들이 필자의 집 앞을 지나가는 날이었다. 키가 작은 사람도 있었고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반반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물을 달라고 들어왔고 물 한동이가 금방 동이 나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샘물에서 다시 물을 길러 오기도 했다.인민군들은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올것입니다. 아주머니 고맙다"는 말을 하고 함양읍 방향으로 내려간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후 수년이 지나 함양읍 삼봉산에서 관내 특공대가 빨갱이를 잡아 목을 칡으로 묶어 끌고 와서 도로변에 가마니로 덮어두었다가 지금의 함양읍 죽림리 시목마을 입구에 묻었던 것을 목격하고 초등학교 등하교시 '저기에 빨갱이 나온다' 하고 무섭게 뛰곤 했다.그 뒤 삼봉산에서는 읍내 친구의 부친이 빨갱이한테 입고 갔던 옷을 다 뺏기고 팬티만 입고 와서 아버지 옷을 빌려 입고 가기도 했으며 오봉산 자락 밭에 아버지와 함께 갔다가 계곡에서 죽은 사람의 뼈를 발견하고 옆에 있던 총과 실탄 철모를 주워다가 수년간 보관하다 불법무기류 자진신고 기간에 당시 난평파출소 오순경한테 신고하기도 했다.내곡마을 대밭 뒤에는 인민군들이 버리고 간 3륜오토바이 한대가 있어 이곳에서 어릴 때 병정놀이 할 때 이용하기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운봉에 모내기를 갔을 때도 야간에 따콩! 따콩! 총소리가 들려 어른들이 빨갱이가 들어 왔다는 소리에 모두가 숨소리를 죽이곤 했다. 이처럼 필자의 어린시절에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빨갱이었다. 어린이들은 울다가도 빨갱이가 왔다하면 울음을 멈추웠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그 후 마천면 일부 지역에서는 밤마다 곡식과 소 돼지를 약탈해 가기도 하였고 특히 구룡리 이모씨 방 천장에서는 수년간 남동생이 고정간첩으로 활약하다가 우리군 경찰 정보망에 걸려 잡혀간 일도 있었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참전용사들이 해마다 수백명씩 돌아가시고 이들에게 지급되는 연금이 소액이라 늘 미안하기만 했다.우리 주변에 살고있는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에게 향상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보살피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회갑년을 맞은 올해의 6·25를 맞으면서 하루빨리 남북통일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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