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평교회 김지영목사몇 주 전에 작은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산길을 눈부시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호젓이 걷는 내 마음속에 그저 밀려드는 평화를 맛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은혜요. 축복이었다. 비 온 후 얼굴을 내밀며 파릇파릇 돋아나는 나뭇잎새 하나 하나에 신비로움을 느끼고. 아래로 정겹게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그저 듣고만 있어도 전혀 지루한 줄 몰랐다. 지리산. 그 넓은 품은 이렇게 세상의 소유의 욕망으로 찌들어 있는 나에게 채울 수 없는 깊은 고요와 안식을 주었다. 작은 배낭 하나 메고. 나 홀로 있으면서 이렇게 모든 것을 얻은 충만감을 누려 본 지도 꽤 오랜만인 것 같았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가짐으로서 행복을 누리라고 집요하게 우리를 설득한다. 이것을 입어야 행복하고. 저것을 타야 행복하고. 이것을 먹어야 행복하다고 한다. 끝없는 소유를 부추기면서. 그 속에서 만족과 짜릿함을 맛보라고 한다. ‘소비하는 인간’은 행복하다고... 반대로 소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한다. 욕망에 의지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우리는 세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인 전도서 1장을 보면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차지 아니하도다” 라고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꿰뚫어보고 있다. 현대 인간은 갈수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걸식증에 걸린 에리직톤을 닮아가고 있다. 시어리즈 신에게 굶주림의 저주를 받은 에리직톤. 그래서 그의 최후는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위해서 자신의 딸을 팔고. 그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살을 뜯어먹으며 마지막을 비참하게 맞이하는 욕망의 화신. 에리직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오래 전 TV 어떤 프로에서 사람들이 쓰다 버린 전자폐품을 분해하는 중국의 가난한 이들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함부로 쓰다가 버려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휴대폰. 컴퓨터 등 폐품들을 하루 종일 앉아서 분해하는 대가로 받는 돈은 우리 한끼 식사 값도 안되는 형편없는 보수였다. 그런데 그들은 폐품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유독물질로 인해서 납중독. 수은중독. 폐질환을 앓고 있었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채 로... 인간의 탐욕과 욕망은 분명 누군가를 희생시키며 얻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연 속에서 공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수없이 반복하며 욕망을 채우는 에리직톤이 되라고 부추기는 물신주의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달콤한 알사탕은 잠깐의 단맛을 주지만. 이내 우리는 그것이 가짜의 달콤함인 것을 깨닫게 된다.가짜의 평안. 사이비 행복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없다. 오늘도 우리 곁 마당에 평범하게 피어 있는 작은 풀꽃 하나에.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우리는 눈을 새롭게 뜨고. 그 속에 살아있는 생명을 보자. 수억년의 지구의 역사에서 나라고 하는 티끌같은 존재가 오늘도 호흡하며 느끼며 가슴 설레는 삶을 살고 있음을 감탄하며. 5월의 새로운 하루를 오늘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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