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특집고향 백전면 위해 큰 업적 쌓았던 재일교포 출신 기업인 靑松 박병헌 그는 누구인가?3월10일(목) 오전 백전면민들은 청송 박병헌 회장 마지막 가는 길 추모하기 위해 고인의 생가 앞에서 노제를 거행했다. “백운산 정기 받은 마을에서 태어나셔서 이국 멀리 타국에 계시면서도 항시 고향을 잊지 못 하시고 한 평생을 살아 오셨던 임이시어. (중략) 이제 우리는 임께서 고향에 남기신 옥석 같은 영롱한 정성을 우리 고향의 자랑스런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백전면민 일동”백전 벚꽃 필 무렵이승과 하직한 거목▲청송 박병헌 회장 약력>함양에서 부 박봉수 모 이성년 사이 6남3녀 중 6남으로 출생. 1982 신한은행 이사. 1985 민단 중앙본부 단장. 1987 해외 한민족 대표자회의 창시 회장겸 운영위원장. 1987 대성전기 명예회장. # 해마다 4월이면 백전면은 벚꽃천국으로 변한다. 이 마을 벚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싶다면 그냥 아무 인터넷 검색창에 백전 벚꽃을 쳐보길 바란다. 한 그루에 수십만. 수백만 개의 꽃을 피우는 백전 벚나무를 바라보노라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다.임순례 영화감독은 백전 벚꽃을 배경으로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제작. 백전 벚꽃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작년 봄. 필자는 영화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취재하기 위해 백전면을 찾았다. 백전면 관계자에게 “이 마을 벚꽃. 대단합니다. 하동 화개∼쌍계사 벚꽃. 전북 완주 송광사 벚꽃이 제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백전에 비하면 조족지혈인 듯 싶습니다. 백전 벚꽃 정말 아름답군요. 당최 이 벚꽃길 언제 조성했나요?”관계자는 말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 일본서 크게 성공한 청송 박병헌 어른(이하 회장)께서 조성했지요. 이 분은 우리 백전면이 낳은 거목이시죠. 어른에 대해 알고 싶으면 재외동포재단에서 펴낸 그 분 회고록을 입수해 읽어보시면 됩니다”해서. 필자는 그 책을 입수. 읽어보았다. 책제목은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을 멈춰 서서>이 책 19쪽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봄 햇살 속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박병헌 회장 가족들이 경남 함양군 백전면 벚꽃 아래에서 상춘을 즐기고 있다. 1987년 촬영. 사진 밑에 이런 설명이 붙어져 있다. <1987년 고향에 심은 벚나무 밤 2천여 그루는 이젠 터널을 이뤘다. 가족들과 벚나무 아래에서 한때를 즐겼다># 청송 박병헌 회장은 회고록을 통해 백전 벚꽃과 관련된 비하인드스토리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12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모진 고생 끝에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이역만리 일본땅에 살면서 나는 오매불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 그리움은 마침내 고향에 실질적인 봉사를 해 보자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궁핍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서 그런지 고향주민들의 환경개선 사업을 먼저 하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지금으로부터 30년전. 나는 벚나무 1만2천여 그루를 고향에 심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내 고향 백전에는 아름드리 튼실한 1만2천여 벚나무가 4월이면 장관을 이룬다”청송 박병헌 회장은 벚꽃단지 조성뿐만 아니라 고향 백전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했다. 한국 정부 거물(전두환 당시 대통령. 이규효 건설부장관)에게 부탁해 백전∼함양 국도. 대전∼진주 고속도로 등을 건설했다. 백전∼함양길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뿐이랴. 고향 백전면 망월정 주변에 공원을 조성했고 많은 후학에게 장학금을 희사해 주목을 받았다. 이런 공로로 제10회 함양군민회를 수상했다. (정부 포상으로는 방위포장. 보국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체육훈장 청룡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있다)고향 백전면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던 청송. 그가 3월7일 이승과 하직했다. 향년 83세. 3월10일(목) 백전면민들은 청송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기 위해 평정리(지금의 평촌) 고인의 생가 앞에서 노제를 거행했다. 집례는 이기평. 축관((祝官:제사 때에 축문을 읽는 사람)은 김주한. 조사는 정봉균씨가 맡았다. 정봉균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인에게 작별인사를 올렸다.“구름도 넘다 쉬어 사는 백운산 정기 받은 마을. 이곳에서 태어나셔서 이국 멀리 타국에 계시면서도 항시 고향을 잊지 못 하시고 한 평생을 살아 오셨던 임이시어. (중략) 이제 우리는 임께서 고향에 남기신 옥석 같은 영롱한 정성을 우리 고향의 자랑스런 이야기로 우리 후손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하겠음을 약속드리면서 이만. 임과의 못내 아쉬운 고별인사를 가늠하고자 하옵니다. 백전면민 일동”이명박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 전대통령.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김무성 원내대표. 김두관 경남 도지사. 박관용.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은 근조화환을 보냄으로써 고인의 넋을 기렸다.나는 함양이 고향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청송 박병헌 그는 누구인가. 그는 1928년생으로 12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자부 산노하시 펄프 제작소 기계공으로 일했다. 해방 후 일본에서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조직을 맡는 등 정치지향적 인물로 성장했다. 1950년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재일 학도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휴전 후 다시 도일. 우익진영의 활동가로 맹활약 마침내 민단 간부(중앙본부 총무국장. 사무차장)를 지내게 된다. 특히 그는 도쿄 엑스포 70 후원회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만국박람회 한국관 설립에 참여하여 본국가족 초청 사업의 기획과 실현에 힘쓰기도 했다. 85년에는 민단 중앙본부 단장으로 선출. 단장 재임시 서울 올림픽 후원회 명예회장으로 올림픽 후원회 기금모금에 수완을 발휘했다. 청송 박병헌의 인생역정을 추적한 일본 다이토 분카 대학 나가노 신이치로 교수에 따르면 “이때 박 단장을 비롯한 민단이 조직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인 결과 525억원이 모금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지금 시세로는 적어도 7천억원이 넘는 돈이죠. 한편 그는 기업인으로서도 한국에 적극 기여했습니다. 1973년에 구로공단 안에 전자부품 회사인 대성전기(大星電機)를 설립했으며 1970년대 후반 재일한국투자협회 설립을 주도했고 1980년대 초반 신한은행 출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지요” 그는 회사 경영 이외에도 평화통일자문위원. 신한은행 이사. 중앙대학교 이사. 한국복지재단 이사. 제일스포츠센터 이사 등을 맡으면서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말년까지 활동적인 나날을 보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고향 사랑을 이렇게 서술했다.<누구를 만나든 나는 함양이 고향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고향으로 나 자신을 규정함으로써 남달리 강한 어떤 귀속의식을 수립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나는 자나깨나 금의환향해 고향집 싸리울을 들어서는 나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곤 했다. 일본서 우동을 먹다가도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시래기국은 왜 그리도 간절해서 눈시울을 적시게 했던지>평생 이역만리에서 고향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백전이 낳은 거목. 이제. 그는 고향 뒷산에서 영면한다. 타향에서 백운산 서기를 그리워했던 임이시어. 유택(幽宅)에 머물며 고향 내음 마음껏 맡으소서!추모 詩이 시는 2010년 7월5일자 주간함양에 소개된 청송의 자작시입니다. 청송은 타향 일본에서 이 시를 암송하며 오매불망 고향을 그리워했다 합니다. 청송을 기리는 뜻에서 재수록합니다.故鄕 - 박병헌 그처럼 그리던 내 고향태어나 12년간 나를 길러준 산천초목외로울 땐 말없이 포근하게 안아주던 내 고향오십성상 타향살이언제나 잊지 못한 내 마을삶의 보람을 비춰 준 생명의 샘이제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고장에 나리라구본갑|본지칼럼니스트busan7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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