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서북에 위치한 함양은 5.6세기경 가야문화권에 속하였다가 7세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쟁탈전을 벌렸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속함 또는 함성으로 불렀다가 천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인 함양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조에 와서 영남학파의 조종 점필재 김종직 동국오현의 한사람인 일두 정여창. 실학의 태두 연암 박지원등 대학자들이 이곳에 학문의 씨를 뿌렸다. 예로부터 양반 고을을 말할 때 “좌안동 우함양‘이라 했는데 “양반은 몰라도 아직도 예절은 지키고 삽니다”라 말하는 어느 주민의 말처럼 아직도 주민들의 전통 고을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한편 함양은 북쪽 덕유산에서 남쪽 지리산이 길게 놓여 있어 자연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덕유산 자락이 감아도는 굽이마다 정자요 물가에는 너럭바위가 곳곳마다 널려있다. 특히 서하면 거연정과 안의면의 화림동계곡(농월정)과 용추계곡의 경관은 거의 선경에 가깝다. 매년 오월이면 고운 최치운 선생의 유업을 기리는 천령문화제(물레방아골축제로변경)를 열고 있는 곳이다.함양향교는 고려시대 때부터 동편지역인 소소당에서 경학을 공부시켜왔는데 이것이 전신이다 관계자에 의하면 소소당은 학동마을로 추정한다고 하며. 함양읍 교산리 원교마을에 위치한 함양향교의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말 두문동72현의 한사람인 덕곡 조승숙의 소소당기에 “명륜당”이란 글이 보여 현재의 향교는 조선 태조7년(1398)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선조때 정유재란(1597)으로 소실되어 새로이 동서 양재와 문루를 두면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경내에는 문묘. 대성전. 명륜당. 동서 양재. 문루인 태극루. 전사. 고직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인근의 백암산 줄기 따라 배산임수로 전학후묘의 형식에 일축선 직렬형으로 배치되어 있다.지난 기축년(2009) 10월 동래향교 선현지 순례행사로 함양향교를 방문하였는데. 마을을 돌아 향교입구로 들어서니 함양땅 전체가 “다볕땅”으로 불리우 듯이 이곳 역시 주변이 포근하고 은은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하마비와 홍전문을 지나 경내를 들어서면 경사지 계단을 이용해 영역마다 근엄함을 느낄 정도로 차이를 둔 것은 특이하다.건물구성은 제일 높은 곳에서부터 대성전. 동서무. 내삼문. 좌우의 전사제기고와 서고. 그 앞에 명륜당과 동서제. 그리고 춘추대제때 북으로 시작을 알리며 예악을 절차에 따라 행하던 문루인 2층으로 된 고종18년(1881)경 당시 명필가인 하동 출신 박문회가 쓴 현판이 걸려있는 태극루와 성생대가 있으며. 들어오는 입구에는 홍전문이 있다.함양향교는 매년 봄가을 석전을 봉행하고 있으며. 삭망분향은 전교와 각 면에 2명의 장의가 있어 이들 장의가 윤번제로 행하고 있다. 함양향교의 유림활동은 여러 가지로 다방면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경전을 중심으로 한 한문. 서예. 청소년인성교육과 한시백일장. 기로연행사 등을 열고 있어. 인근의 유명했던 안의향교와 함께 이 지역의 전통적 유맥을 꿋꿋이 지켜오고 있는 함양향교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상림공원에서는 앞서 언급한 정여창. 박지원 두 선생 이외에도 나말 당시 천령으로 불리던 이곳의 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원의 고뇌하던 지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군청 앞 학사루에서는 점필재 선생과 무오사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성계의 쿠데타에 반대하고 산림에 은거 하였던 고려말 학자들의 후학들이 대부분인 영남사림이 중앙관계로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였는데 그 중심인물은 김종직이었다. 그가 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선천적 간신인 훈구파 유자광이 고향 남원에서 함양에 놀려와 쓴 글을 학사루에 걸어 놓았는데 김종직군수가 “어찌 유자광이 감히 여기에 글을 걸 수가 있는가?”며 글을 때어 불태워 버렸다.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복수할 것만 생각하고 내색치 않다가 성종이 죽자 연산군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이극돈을 실록청 당상관에 임명하였고. 때를 기다린 유자광은 드디어 이극돈을 충동하여 문제를 만들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꼰 글”이라고 김종직의 글에 직접 주와 해설까지 붙여 연산에게 올리며 김종직이 지은 글을 모두 불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자광은 함양학사루에서 자신의 글이 김종직에 의하여 불태워진 것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제자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박한주등 20여명이 죽거나 귀양을 가 영남 사림이 사기를 잃고 크게 위축되었다. 채근담에서의 관용이라는 말과 논어 자로편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는 사람들과 서로 잘 어울리지만 덮어놓고 남의 말을 따라 함께 하지 않고. 소인은 덮어놓고 남의 말을 따라 함께 움직이지만. 서로 잘 어울리지는 않는)를 되새겨보며 공자님이 자공과의 대화에서 싫어하시며 경계하도록 했던 종류의 수치스러운 사람이 우리주변에는 없기를 바라며 함양향교를 뒤로하고 발길을 돌린다.<동래향교 장의 송정영> 지난 기축년(2009) 10월 동래향교 선현지 순례행사로 함양향교를 방문하였는데. 동래향교 유림신문에 게재된 함양향교 탐방을 소개 한다.-마장현 유교신문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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