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복주 논설위원성경에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이 나온다. 예수가 죽은 자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하자 죽었던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나온다. 예수 그 자신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3일 후에 살아나 도마에게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보라 하며 이렇게 말한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우리의 지식이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역사 이래로 없다고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전해 오는 문헌을 잘 살펴보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았다는 부활의 기적은 의외로 많이 전해 내려온다. 그 기적이 현대에 사는 오늘의 시대. 아니 두 달 전에 일어났다. 칠레의 기적이다. 한 명이 아니라 그것도 죽었던 33명의 사람이 전부 살아 세기의 놀라운 부활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2010년 8월5일 칠레 산호세 광산은 붕괴된다. 구리를 캐내고 있던 33명의 광부들은 무너진 지하 700미터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일순간에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일하던 일터가 자신들의 무덤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깊은 땅 속 캄캄한 어둠의 갱도 속에서 외부와는 한없이 단절된 죽음. 공포. 침묵. 불안이 가득한 저승의 타르타로스. 이틀 간의 식량과 약간의 식수만이 지상의 신이 그들에게 베푼 은혜였다. 희망은 없었다. 그들은 각기 머리 속으로 죽음을 생각했고. 부모를 떠올렸고. 아내와 자녀의 얼굴을 떠올렸고. 신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성이나 예의는 필요 없는 것이 돼버렸다. 야만이 지배하는 세계가 될 뻔 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먹는 인육까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외부와 생사의 소식조차. 구조의 소리조차 단절된 지하 땅 속에서의 17일간의 생활은 그야말로 죽음 그 자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신을 믿었다. 판도라의 상자에 단 하나 남아 있던 ‘희망’이란 인간의 축복 선물을 버리지 않았다. 희망 그대로. 믿음 그대로. 기적 그대로. 신의 축복 그대로. 69일 만에 그들은 죽음의 무덤에서 부활하여 지상으로 살아 돌아온다. 살아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구한 것이다. 그들은 참치 2스푼으로 하루를 견디었으며. 민주적 방식에 의해 결정하고 생활했으며. 죽음 속에서도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을 하며 희망과 부활을 믿었다. 우리의 주변엔 죽음이 많다. 한국은 자살 1위 국가다. 어느 재벌의 죽음이나. 인기 배우들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행복 전도사의 죽음이나. 하루 아침의 죽음은 산자들을 당혹하게 한다. 우리를 슬프게. 허망하게 한다. 그러나 칠레의 기적을 보라. 죽음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며 감사한 일인가를 보라.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죽음의 끝을 보려 했다. 그들의 희망과 용기는 어느 명화보다도 감동적이다. 유한 생명에게 있어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그러나 생의 가치는 생에 있지 죽음에 있지 않다. 생을 당당하게 아름답게 산다면 죽음마저도 당당하고 아름다워 진다. 죽음은 한 세상의 번데기 껍질을 벗고 저 세상으로 가는 부활의 통로인 것이다. 또 그렇지 않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믿음이 있는 자에게 신도 있고 부활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신화의 힘을 설파한 죠셉 캠벨은 말한다. “살아있는 이곳이 천국이다. 죽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부활을 부른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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