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순행절규와 유언비어가 아우성 쳤던 선거판의 난장을 탈출하여. 그리움을 찾아 길을 떠난다. 유월의 현란한 푸르름 속으로 꿈 길 더듬어 도착한 완도항에서 뱃길로 50분이 지나자 엷은 운무 사이로 그토록 그리웠던 청산도가 조용히 다가섰다. 서편제 영화를 본 뒤로 진도보다도 더 그리워했던 섬이다! 가파른 삶의 저쪽에 피안의 섬 이어도를 향한 그리움 같은 것이랄까? 도착하자마자 선창가 횟집에서 해삼과 소주 한 병을 시켜 마시고는 슬로길(지리산 둘레길 같이 이곳에도 천여개의 길에 번호를 붙여 슬로길이라고 표지판을 세워두고 있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청산도는 진도아리랑의 긴 여운이 들녘 끝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은 몽환적인 정서를 간직한 섬이다. 선조들의 한(恨)이 서렸을 붉은 황토밭을 구경하며 20여분만 걸으면 서편제 영화를 촬영한 세트장이 있는데 영화 속 유봉 일가가 기거했던 집이다. 초가로 된 세트장 마루에 걸터앉아 도락리 포구를 내려다보는 풍광은 그림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리고 이 섬에서 금방 느낄 수 있는 것은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고 너무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바쁘다는 단어가 필요 없을 것 같은 곳이다.아세아 최초로 국제기구가 공인한 '슬로시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이곳은 너무도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섬이다. 물론 이곳에도 자동차 많이 다니고 경운기도 다니지만 어쩐 일인지 내 귀에는 그것들이 내는 소음이 들리질 않으니 이상하다. 언덕 조금 위쪽에 소공녀의 집 같은 '봄의 왈츠'세트장과 진청색 바다. 그리고 어디를 보나 붉은색과 청색으로 지붕을 색칠한 그림 같은 마을들의 정경을 보노라면 흡사 '잃어버린 세계'에 온 것 같은 상념에 젖는다.4년 전 선거에 낙선하여 '신의도' 산 중턱에서 고깃배가 틀어 놓은 황포돗대의 청승이 늘어진 노래를 들으며 슬픔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했던 생각이 난다. 낙선이 괴롭다면 비우지 못한 속인의 고통임을 그 산 중턱에서 배웠다. 지난 초파일날 사랑과 비움의 등불을 다신 분들은 그러지 않겠지만. 당선의 기원을 담은 등불을 다신 분들이 낙선을 하셨다면 엄청 괴로워할게다. '봄의 왈츠' 세트장을 둘러보고 망상 해수욕장만큼이나 드넓은 신흥리 백사장 옆 산길을 감돌아 걷다보니 확 트인 바다와 십리도 넘을 갯바위 지역이 펼쳐진다. 작은 파도가 돌멩이를 적시는 바위에 걸터앉아 캔 맥주를 마시는데. 문득 혼자 떠나온 여행길이라 아내에게 영 미안한 것이 자꾸 걸린다.못난 남편이 만들어온 구차한 살림에 구겨진 마음 한번 펴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후보 탈락의 아픔을 감내하든 눈빛은 지금도 가슴에서 영 지워지질 않는다.아내를 바라보면 문득 문득 '길'이라는 영화의 여주인공 '젤소미나'를 떠올리곤 했다. 부랑자가 불쌍한 여자를 사서 길 위에 버리고 떠난 뒤 다시 찾았지만. 아기 낳다 죽었다는 아낙의 말에 '젤소미나!'를 절규하듯 부르며 해안을 헤매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어떨 땐 애틋함과 평범을 상실한 사람 같지만. 어렵던 삶의 질곡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세월 속의 아내 젤소미나! 그래서 물기 어린 사랑이 있다.도청항 선창가 등대모텔에서 여장을 푼 뒤. 바닷가 가스등이 하나 둘 켜지고 개구리 울음이 논둑 물고를 넘을 즈음 도락리 해변가 구릉길을 걷는데. 저녁별이 총총한 밭두렁에서 무언가 꼼지락거려 다가가니 팔순도 넘었을 할머니 한 분이 일을 하고 계신다. 영롱한 초저녁 별빛과 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영혼의 노래 해조음 소리. 향기로운 밤공기-그리고 할머니와 황토 밭!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 할머니에게는 이미 허물어져 할머니가 밭이고. 밭이 할머니라는 생각이 스친다.아∼! 이 할머니가 바로 비로자나불이구나! 갑자기 진도의 아라리가 이 작은 포구 가득히 울려 퍼지는 감동에 젖는다. 아늑한 피곤 속에 하룻밤을 새우고. 이튿날 지리 해수욕장 해변과 섬 전체를 자동차로 구경한 뒤. 오후 2시20분 완도행 배에 차를 실었다. 멀어져 가는 청산도 당리마을 언덕에서 '봄의 왈츠' 세트장이 그새 정이 들었는지 신비로운 안개 넘어 손수건을 흔들어 준다.언제 다시 올까? 잃어버린 세계 청산도! 어쩜 들리지 않는 게 좋겠다. 삶이 어려울 때 그리워 할 수 있는 피안의 섬 '이어도'로 기억하는 그리움이 더 아름답겠지. 청산도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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