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광부와 경남도에서 2001년부터 지속적으로 자원봉사 활동중인 문화관광해설사들에 대한 해외연수가 11월 16일부터 21일까지 있었다.관광객과 지역사회간 문화의 가치 전달자. 지역 홍보대사로서 역할 증대에 따른 처음 시도되는 해외연수였던 만큼. 1.2기 최초 위촉 활동자 및 스토리텔링 경연대회 입상자 등에 대한 문화 유적 탐방기회로 방문지역은 중국의 심양. 환인. 집안. 이도백화. 동경성. 연길 등으로 우리의 과거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발자취를 따라 진행되었다.이 편지는 실향민인 아버지를 생각하며 함양군 문화관광해설사 전영순씨가 흔들리는 차 안에서 쓴 편지로 연변과 연길을 지나 용정을 넘어 도문 건너편 두만강 줄기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사무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한 것이다.※아버지께 올리는 편지아버지 이제 벌써 팔십이시죠어릴 적 자다가 눈을 뜨면 아버진 늘 어머니가 준비한 간단한 밥상을 받고 있었어요.하루는 부스스 눈 비비다 일어나 보니 텔레비전을 보며 울고 계신 아버지를 볼 수 있었는데12시를 넘겨 자다 깬 나는 아버지가 울고 있는 모습에 너무 놀라 덩달아 울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때 텔레비전엔 송해가 미국 LA에서 진행하는 동포위문 공연이었는데 마지막에 ‘나의 살던 고향’ 을 부르며 진행자와 동참자 모두가 서러워 어쩔 줄 모르는 마지막 장면이었던 것 같애요. 아버진 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는데 다음 날 어머니께 들은 얘기로는 북의 동포들과도 함께 하며 언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는 이야기에 아버진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학교를 졸업하고 철이 들어 자식을 놓고 살면서도 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애끓는 간절함은 항상 밀려나 있었어요.내 극박한 삶의 우선 해결이 먼저였고 아버지의 고향과 뿌리에 대한 생각을 따져볼 느긋함이 없었던 것 같아요.그러던 몇 해전 명절날. 아들 며느리 사위를 앉혀놓고 황해도 해주 집을 그리듯이 설명하며 노랗게 변해버린 문서 두 장을 내놓을 때 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나이가 들어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미리 자식들에게 유언이라도 하듯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가는 방법과 가서 누구를 찾아야 되는지 등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저희들 모두는 울고 말았어요.하지만 저는 그 와중에도 또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답니다.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황해도 해주 땅문서와 집문서가 나중에 자식들에게 불화의 불씨가 될까 아버지의 고향증거품을 저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어요. 아버지의 그리움을 물질적으로 계산한 못된 딸자식이었어요.2년 전 연변을 통해 두만강 주변에서 북한에 살고 있을 남은 가족들 생사만이라도 알려고 돈을 썼지만 어찌 일이 잘못되어 아버진 또 상처만 받고 말았죠.아버지는 열 여섯에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셨죠.한창 부모와 밀접하게 끈끈한 정을 엮어갈 시점에 부모와 떨어져 억지로 내밀려 남으로 내려 왔으니 어머니 얼굴이 보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도 했다는 작은 아버지 말씀이 떠오릅니다. 함께 나온 큰 조카는 먹을 식량을 구하러 온 길을 되돌아가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같이 데려올 수 없어 그 자리에 그냥 두고 왔다고 하는데 생사가 어찌 되었을까요?고향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추정하고 언제부터인가 우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영정도 없이 지방만 두 장 붙여 절을 올리지만 아버진 그래도 희망을 갖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요즘엔 북도 살기 좋아져서 100살 넘기는 사람이 많을 거야” 라고 할 때 우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아버지랑 같이 서울에 발을 디딘 큰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등에 업고 오셨다던 작은 아버지는 힘에 부치셨는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큰 집 오빠는 명절날마다 무조건 식구들을 뭉치게 애써 불러 모읍니다. 저는 시댁 제사가 있어 가기도 어렵거니와 서울을 지나 양평까지 힘들어 늘 포기만 하고 그저 식구들의 소식을 전해 듣기만 할 뿐입니다.남동생의 결혼식날. 젊은 날 영화배우처럼 멋있었던 작은 아버지가 어긋나는 걸음걸이로 아버지를 형님하고 부르며 진하게 안는 모습에 저는 마음이 급해 졌습니다.이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밖에 없는데. 우릴 데리고 가서 해주의 여기저기를 알려 줄 두 사람인데 세월을 비켜갈 수 없는지 할아버지 두 사람이 지팡이를 나란히 짚고 있었습니다.아버지 저는 오늘 아침 연변의 수도 연길을 지나 도문이라는 작은 촌락을 지나고 있습니다.건너편으로 계속 따라 올라 가면 북한과 마주 하고 있어 경비도 나름 살벌한 곳이라고 합니다. 첫 날부터 안내하는 가이드는 우리의 잃어버린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맘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중요한 유적엔 어김없이 중국의 공안이 따라 붙고 있어 사진조차 제대로 찍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머릿속에 새겨진 두만강은 어떤 색깔일까요?제가 지금 바라보는 두만강은 빨간색도 청색도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강에 불과합니다.우리의 그것보다 정비가 안 되어서 오히려 탁해 보이기도 합니다.명절 때마다 듣는 몇 십 년 된 아버지의 레퍼토리는 이제 제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선죽교. 박연폭포. 두만강. 황해도 보쌈김치. 큼직한 만두. 고구마와 감자를 바꿔 부르는 아버지가 어릴 땐 지겹기도 했어요. 자식들만 만나면 고향 얘기를 한다고.아버지 저도 이젠 알 것 같습니다.고향이 사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국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평생을 미군부대 한 곳에서 시계추처럼 걸어오신 아버지는 두고 오신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국가유공자 훈증까지 받으셨습니다. 난 죽으면 국립묘지에 간다며 자랑삼아 얘기할 때 저흰 정말 어깨가 뿌듯했습니다. 아버지가 늘 앉아 계시는 흔들의자 밑에 종이 한 장을 보았습니다.고향 지명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이 가득 적혀 있었습니다. 기억을 놓지 않으려 암기하듯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맨 몸으로 나와 동생들과 저를 훌륭히 공부시켜 주셨고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이 우리를 키워 주셨는데 저와 동생들은 아버지의 아픔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잘못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아버지 여기 도문에서 해주까지는 3일이 걸린다고 합니다.아버지 대신 제가 버스에서 내려 어딘지도 모를 해주로 가야 될 것 같은데 버스는 자꾸만 옆으로 비껴가고 있습니다. 가슴에 사무친 고향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떠나신 큰 아버지처럼 갑자기 아버지를 떠나 보낼까 저는 두렵습니다. 아버진 이념 때문에 할아버지가 서울로 내려 보냈다 했습니다.세월이 흐른 지금 남과 북의 사람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서로를 그리워만하다 뜨거운 눈물만 쏟아 내고 있습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 무슨 사상. 이념이 필요합니까? 지금 당장 아버지께 보여 드릴 수만 있다면 내 몸의 일부와 바꾸어서라도 아버지의 고향과남은 식구들을 찾아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희망처럼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땐 동생들을 앞세우고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꿈에도 잊지 못하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아버지의 걸음이 더디면 저희들이 등에 업고서 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어만 주세요.아버지 원래 한 겨레이고 한 나라인데 하나로 모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요.아무도 보상해 줄 수 없는 깊은 슬픔의 뿌리가 아버지 가슴에서 뽑혀 나가는 날이 있을 겁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남북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아버지 우리 그 때까지 참고 기다려 보자고요. 50년을 넘게 기다려 왔는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요? 아버지가 그리는 북의 사람들 모습이 바로 앞에 보이는데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저는 복받치는 울음을 참으며 달리는 차창 밖만 쳐다봅니다.아버지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용정을 지나 연변. 도문을 지나며 딸자식인 저에게도 애절히 전해집니다.아버지 부디 오래 사세요딸자식 영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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