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 이 세상은 오늘도 수 없는 분쟁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서 그 분쟁과 갈등 속에서 때로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피해자가 되어 분노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피상적으로 구별하는 가해자와 피해자는 사실 더 깊은 뿌리를 살펴보면 가해자가 곧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얼마 전 한편의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배경은 1940년 세계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사건을 그리고 있다. 8살 된 어린 소년 브루노는 나찌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그 동안 편안하게 살던 베를린을 떠나 새로운 아버지의 근무지인 외딴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 브루노에게 친구 하나 없는 아버지의 외딴 근무지는 다름 아닌 유대인 수용소. 유대인에게 잔혹하게 노동을 시키다가 가스실로 보내 학살하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유대인 수용소였고. 아버지는 그 수용소의 책임자였다. 나찌장교 아버지는 시신을 태우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 냉혹한 마음을 가졌지만. 그러나 정작 어린 아들 브루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그곳을 궁금해하는 아들에게 그저 ‘농장’이고. 절대로 그 근처에 가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지루한 하루 하루를 집안에서 지내다가 결국 그 ‘농장’ 철조망에 다가가고. 철조망 구석에서 잠깐 앉아 쉬고 있는 슈무엘이라는 유태인 소년을 만나면서 서로는 가까워진다. 브루노는 슈무엘에게 먹을 것을 가져가 주고. 친구가 되지만. 늘 줄무늬 잠옷을 입고 있는 소년의 고달픈 삶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브루노는 유태인 친구 슈무엘이 잃어버린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친구의 아버지를 찾아주기 위해 철조망 땅 밑을 파고 수용소 안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러다가 브루노는 유대인들의 혼잡한 무리에 섞이게 되고. 얼마 후에 유태인들과 함께 가스실로 떠밀려 들어가 검은 연기로 변하고 만다.나중에 부모는 그 사실을 알고. 달려가 학살을 멈추라고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브루노의 부모는 절규한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가해자는 결국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오열하는 최대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시대와 배경은 달라도 오늘날 여전히 인간은 이런 어리석은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사실 모든 인간은 한 운명체다. 우리는 함께 같은 지구에 살고 있다. 하나의 땅을 밟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분리하고. 경계를 나누기에 익숙하다. 나와 너. 아군과 적군. 가해자와 피해자. 부자와 빈자. 자연과 인간... 그래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넘어야 내가 산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뿐인 자연을 마구 파헤쳐 거덜내고. 환경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기억할 것은 인간은 공동 운명체다. 함께 하늘의 비를 받고. 하늘의 빛을 받아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다. 한동안 가물었다가 단비가 내리고 있다. 비는 함께 사는 모든 땅에.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축복의 비를 주고 있다. 우리 각박해진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풍성한 마음이 고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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