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여행기 ‘1250원의 행복’ -19 유림면 화촌마을(2018년 8월 현재)♧ 화촌리 소재 ♧ 세대 : 77가구♧ 인구 : 131명(남54, 여77)♧ 농가 : 53가구♧ 주요농산물 : 벼, 양파, 밤 등♧ 이장 : 박선호 미남미녀가 함께 사는 꽃마을, 화촌 유림면은 임천을 경계로 동쪽으로는 산청군과 접해있고 서쪽으로 함양읍이 있다. 1914년 유등면·예림면·사근면·관변면 등에 소속되었던 21개 동이 서주리, 유평리 등 9개 리로 구성된 유림면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그 중 화촌리는 원래 예림면의 열음계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유림면에 편입시켜 지형이 꽃처럼 아름답게 생겼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본 마을 이름인 별음계는 한자로 쓰면 별음이 꽃화(花)자로 쓰이며 그 뒤에 마을 촌(村)자를 붙여 화촌마을이라고 한다. 또 일설에는 옛날 지관(풍수론에 기반하여 집터와 묘터를 정하거나 길흉을 평가하는 사람)이 마을 뒷산에 화심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여 화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함양지리산고속의 농어촌버스를 타고 화촌마을로 가려면 유림, 장황, 문상(도정) 방면 버스를 타면 된다. 함양에서 출발하면 50분 정도 소요되며 유림초등학교 도착 전 버스에서 하차하면 된다. ● 나무가 머금은 ‘살아있는 물’마을 앞 입구에는 수령 520년보다 실제로 600여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가 마을을 대표하고 있다. 1972년에 세워진 표지판에 의하면 나무둘레는 5.6m, 수고는 17m이다. 나무 아래 줄기에는 혹이 많이 있고 부러진 줄기 사이로 새싹이 자라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 느티나무에서는 지상 10m지점에서부터 나무의 수액이 떨어지면 그 해는 반드시 풍년이 되고 수액이 나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그 구멍이 너무 커 막아 두었지만 여전히 마르지 않고 600여 년 동안 수액이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박선호(70)이장은 “마을의 풍년이 계속 되려는지 막은 구멍 사이로 지금도 물이 조금씩 떨어진다”고 한다. 5.6m의 큰 둘레의 나무는 한쪽 가지가 작년 태풍 때 부러졌다. “큰 태풍도 아니었는데 나무가 오래되다 보니 쉽게 부러진 것 같다”며 “신기하게 그 곳에 움이 트기 시작해 마을에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어렸을 적에는 매일 친구들과 놀던 곳, 지금은 마을의 쉼터와 안식처가 되는 곳, 나무를 바라보며 풍년을 기원하는 곳, 느티나무 아래 마을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며 웃음이 피는 곳이다. 화촌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동네 보물이라고 불렀다.● 미녀들의 수다 꽃마을답게 마을 어르신들의 외모도 빠지지 않는다. 어머니들은 화장을 하고 형형색색의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 만나는 거야.” 강렬한 빨간 옷에 에너지가 넘치는 정금옥(59)씨는 마천면에서도 만난 적이 있다며 취재진을 반겼다. 6월 11일자 신문에 게시된 마천면 금계마을 취재에서 만났던 그녀다. 정씨는 21살 꽃다운 나이에 마천면에서 시집와 화촌마을에서 살고 있다. 말에 힘이 있고 씩씩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톡톡히 드러낸다. 어떤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냐고 물으니 조금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게 농사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노는 사람이나 다름없지 뭐” 라며 농담도 했다. 남편과 만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소개 받아서 연애도 하고 결혼까지 했다는 그녀는 “재산이 아무리 없어도 서로 마음에 들면 사는 거야”라며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모인 자리에서 제일 고령자인 김옥순(92)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핑크색 옷에 92세의 나이에도 피부가 고왔다. 16살 어린 나이에 거창군 내동마을에서 아무것도 모른 체 이 곳 화촌마을까지 시집을 오게 됐다. 딸2과 아들 2을 낳고 손자 손녀까지도 있다고 했다. 요즘 고민은 30살 된 손녀가 시집을 안가서 걱정이라고 한다. 링 귀걸이를 하고 이름에도 예쁨이 묻어나오는 강덕예(70)어르신은 20살 휴천면에서 시집왔다. 3형제를 낳고 딸이 없어 아쉬웠는데 지금은 결혼한 아들의 며느리가 딸 같이 잘 하고 있다며 자랑이다. 그녀는 유림면에 가까운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남편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 갈 곳이 없었던 그녀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교회를 갔다고 한다. 그렇게 교회에 가서 도움을 받고 꾸준히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후에는 남편도 같이 교회를 나가게 됐고 술,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아들 딸들 다 땅파서 키웠지.” ‘땅을 판다’는 말은 땅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는 말이다. 땅을 파면 심은 농작물이 나온다. 감자, 무, 배추, 고추, 고구마 등 보물이 따로 없다. “이 마을로 시집오면 잘 산다고 해서 여자들이 시집을 많이 왔어. 우리 집에도 언니, 나까지 두 명이 왔지”라며 휴천면 대포마을이 고향인 강말순(67)씨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별음마을에 딸을 두명이나 줬다고 그러더라고. 별음을 발음을 쎄게 해서 내삐린 동네라고 했어.” 옛날에는 물을 안고 윗동네에서 아래동네로 시집을 오면 잘 산다는 말이 있었다. 유림면 화촌마을로 시집을 온 어머니들은 유림의 윗동네에 있는 주로 마천, 휴천 등이 고향이다. ● 마을저수지가 3곳, 물 부족은 없어 화촌마을에는 저수지가 3곳이 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모르게 오래된 저수지, 못골저수지. 사람도 여럿 빠졌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화장산 올라가는 길에는 뒤뜰저수지가 있다. 정정숙 경로회장은 “오빠가 면장을 할 때 이 저수지를 팠다. 그때 사람들이 흙을 파서 나르는 걸 도장을 찍어 표식을 하여 일당을 주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마을저수지 중 마지막 한 곳은 방앗골저수지(또는 씨앗싯골저수지)이다. 이렇게 저수지가 마을 곳곳에 있어 화촌마을은 농사를 지으며 물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귀농인 박철선 마을어르신들인 너도나도 인터뷰를 꼭 해야 한다고 성화였던 이가 바로 박철선(60세)씨이다. 박씨는 KT에서 35년간 근무하고 퇴직 후 이곳으로 귀촌했다. 화장산 바로 아래에 집을 지어 이곳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전기가 없으니 냉장고도 전기밥솥도 없다. 여름엔 선풍기도 없고 겨울엔 보일러도 없이 산다. 저수지 물을 길어 생활하는 박철선씨는 자연인같다. 이런 박씨가 마을 인심을 얻은 것은 오로지 기본을 지키기 때문이다. 어르신 공경하고 마을청소도 솔선수범하며 몸을 부지런히 놀리니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다. 박씨는 이곳 화촌마을을 귀농귀촌의 메카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크다. 아름다운 화촌마을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전설적인 씨름꾼 노장군(노한성) 화촌천을 끼고 있는 정자 건너편에는 넓은 언덕에 큰 묘가 하나 있다. 해마다 벌초를 하며 잘 가꾸는 이곳은 화촌마을 어디에서든지 보이는 명당자리다. 그 곳에는 꽃에 나비가 앉아 있는 지형에 속한다고 해서 지어진 ‘나우(나비)산’이라고 한다. 그 밑에 있는 화촌천에는 산소(쏘)가 있다고 한다. 그 묘의 주인은 해방 전후에 일본과 한국 씨름판을 휩쓸었던 노장군이라고 한다. 노장군이라 불리는 노한성씨는 이곳 유림면 화촌마을에서 부유한 농가의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덩치가 커 동네씨름판을 휩쓸고 다녔다고 한다. 노씨는 2미터가 넘는 키에 100kg이 넘는 몸으로 스모도 도전했다. 이후 ‘부산 노장군’이란 별명으로 유명해졌으며 부산씨름 협회 회장을 맡아 후학들을 양성하며 생을 마감했다. 마을 입구에는 노장군의 후손들이 제를 지내는 제각도 있다. 예전에는 화촌마을에 면소재지가 있었다. 보건소도 있었고 농촌지도소도 있었다. 그야 말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웃대 어른들은 마을은 벌통이라 보고 면사무소 자리는 여왕벌을, 학교가 일벌을 상징하는 터였다. 한창 잘 나가던 화촌마을에는 면장만 8명이 나왔다. ● 화촌마을 출신 자랑스런 향우화촌마을 출신 중 노씨 집안 사람들이 유명세를 탄다. 노시범 서울 잠실 롯데월드의 산증인 ㈜동림 대표이사가 이 마을 출신이다. 노 대표의 아버지는 유림면장을 지낸 공직자이다. 조부도 당시 면의회 의장을 지냈다. 노 대표의 고향사랑도 애틋하다. 1년에 열 번 이상은 고향을 찾는다. 향우회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초 재경함양군향우회가 재결성된 뒤 지금까지 꾸준히 향우회에 참여하고 있다. 노시범의 사촌 노시동 유림면향우회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 외에도 서춘수 군수 외사촌 노영환 ㈜동일테크 회장, 성남시 시의원이었던 노환인 전의원도 있다.● 화촌마을의 꿈, 화장산화촌마을의 명소인 고도 582.2m의 산나물 생산지 화장산은 “한 번도 안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산이다. 화장산은 마을 주민들의 어릴적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래 밭에서는 목화 농사를 많이 지었다. 어렸을 때는 길쌈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삼베, 무명 길쌈을 해서 쌈짓돈을 만들어 그렇게 자녀들을 키웠다. 어르신들도 어린 시절에는 노는 게 일이었다.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숨바꼭질, 제기차기, 그네뛰기... 지금은 전통놀이가 된 이런 놀이를 친구들과 모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면 즐겼다. 지금은 매년 화장산 정상에서 화촌마을 주민들과 1월 1일 새해맞이 떡국을 나눠 먹는 등 행사도 열리고 있다. 2015년 화촌마을에서는 이 화장산을 이용한 ‘화장산 산나물축제’도 개최했다. 그 당시 산나물 단지와 ‘화장산 둘레길’ 등이 조성되었으며 관광객들이 산나물을 직접 채취하고 농촌체험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1회 축제를 열고 마을의 축제가 사라져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화장산을 활성화해서 우리 마을에도 관광효과가 올라가고 사람이 북적했으면 좋겠다”며 “모노레일도 깔고 산나물도 재배하고 여러 가지 다용도로 활용하면 얼마나 좋겠어!”라고 박양호(81) 전 노인회장은 마을에 대한 큰 꿈을 전하기도 했다. 정세윤·박민국·하회영·유혜진·차혜진 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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