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목산장에서 이틀째 밤을 보내는데, 첫날 밤 벽소령산장에서 오작동 되었던 나의 두뇌시스템이 또다시 에러를 일으켰다. 나의 두뇌는 <이틀째 산길 걷느라 고생한 당신 충분히 잠을 자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이웃 침상에서 자는 산동무들의 코골이 공연을 관람하라.>는 어리석은 명령을 내린다. 나는 준비해간 다래주 두병을 처방하여 두뇌시스템을 꺼버렸다. 지난밤에 별이 총총했기에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는 설렘으로 눈이 일찍 떠졌다. 시계를 보니 허걱~ 겨우 새벽 한시다. 너무 일찍 깨어 다시 잠들려는 노력을 서너 시간 하다가 아침 아닌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려 천왕봉으로 올랐다. 정상에는 이미 많은 산꾼들이 해돋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가운 밤공기에 모두들 벌벌 떨면서도 이제 곧 붉은 해를 볼 수 있으리라는 설렘에 활기가 넘쳤다. 나도 이틀 산행에 지친 몸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면도도 못해 해돋이를 보기엔 민망한 몰골이지만 정상에 모인 사람들의 열기에 덩달아 힘이 났다. 천왕봉 해돋이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데 운이 좋았던지 완벽한 해돋이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무대 저편에서 황금으로 된 화살 한 두 개씩 어둠을 뚫고 쓩쓩 날아오는 듯하더니 이어 수천수만 발의 황금화살이 한꺼번에 날아오는데 구경꾼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린채 와와~하고만 있었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자~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천왕봉에서 멋진 일출까지 보았으니 이제 집으로 가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전날 저녁부터 불편했던 왼쪽 무릎이 점점 더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처음부터 나는 7시간 정도 소요되는 칠선계곡으로 하산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아픈 다리로 절뚝거리며 내려갈 생각을 하니 부담이 되었다. 중산리 코스로 계획을 변경하면 서너 시간 만에 내려는 가겠지만, 중산리에서 집에까지 지리산을 둘러 가는 것도 생각해야 해서 무리가 되더라도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칠선계곡 하산 길은 말 그대로 물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마폭에서 떨어진 물은 삼층폭포를 만들고, 다시 대륙폭포, 칠선폭포를 거쳐 비선담, 옥녀탕을 만든다. 그래서 다시 선녀탕으로 흘러내리는데 물을 따라 나도 흘러가다보니 그 길은 정녕 나를 한없이 낮추는 길이다. 다리만 아프지 않다면 우아한 동작으로 내려가겠지만, 한쪽 무릎이 아프니 어쩔 수 없이 절뚝거리며 개헤엄 치듯 내려갔다. 두손 두발을 다 사용하니 확실히 무릎 관절에 부담은 덜하다. 칠선골짝엔 게발딱지가 지천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게발딱지를 들뫼 순과 함께 나물 중 최고로 쳐준다. 아픈 다리로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살아서 내려왔다. 두지터를 지나 추성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달리니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나의 스윗 홈이다. 그런데 지리능선에서 맞은 신비의 주사제는 분명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다. 즐거웠지만 힘들게 종주를 하고 불과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리 능선에서 만났던 진달래와 바위와 하늘이 눈에 어른거린다. 금단현상인 양 혼자 히죽거리는 이 병에는 약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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