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사정으로 감나무 전정 작업을 못하고 있다가 전동가위를 확보하였다. 고가의 충전식 전동가위는 많은 과수 농가가 임대사업소에서 신청 순으로 빌려 쓰는 것이라 내가 시간이 날 때는 가위가 다른 농가에 가 있고 가위가 준비되었을 때는 내가 또 바쁘고 이래저래 숨바꼭질 하다 작업이 지연되었는데, 이제 감나무 새순이 빼꼼빼꼼 나오고 있는지라 더는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늦었지만 다행히 전동가위를 확보하고 충전도 가득 해두었다. 아무리 전동기계라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감나무 과수원 이천 평 작업하려면 한나절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지난 번 처음 가위를 빌렸을 때에는 홍보 동영상에 넘어가 반나절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실제 해보니 어림없었다. 동영상에서는 미모의 여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포도나무 가지를 싹둑싹둑 잘라내었지만 광고는 광고일 뿐 실전에서는 가지가 조금만 굵어도 쉽게 잘라지지 않았다. 야구방망이의 잘록한 모가지 정도 굵기만 해도 서너 번은 나눠 잘라야 하고 그보다 굵은 가지는 아예 잘라지지 않았다.
굵은 가지는 따로 톱으로 잘라야 해서 나는 손톱을 별도로 준비했다. 어쨌든 이번에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시작하려고 마당을 나서는데 아뿔사~ 비가 내리고 있다. 정말 유감스럽다. 최근 계속 임대 출장 중이던 전동가위가 어쩐지 쉽게 내 손에 들어오더라니, 비 예보가 있었던 것이다. 농사는 장비가 하는 거라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계속 날씨가 좋아 산과 들에 핀 꽃나무만 쳐다보고 일기예보를 보지 않았던 게 불찰이었다. 비가 오는데 무리하게 미끄러운 사다리를 타고 작업을 강행할 수는 없는지라 하늘만 쳐다보고 있자니 작업도 작업이지만 덤벙댄 내가 한심하고 돈도 아깝다.(이거 한나절 빌리는 돈이 얼만데...제기랄)
다행히 비는 그쳤다. 이른 점심을 챙겨먹고 과수원으로 달려가는데 봄비로 목욕재계한 신록이 막 채색한 그림이다. 조팝나무 군락 하얀 꽃방망이마다 안타성 향기를 마구 날린다. 무덤 옆에는 할미꽃 피고 솜방망이도 노란 꽃대를 쑥쑥 올렸다. 머위 꽃도 지천이다. 여기 사람들은 머위를 머구라 하고 머위 꽃은 할배라고 하는데 처음에 나는 왜 꽃을 할배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꽃보다 할배?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하얀 골프공처럼 생긴 꽃이 할배 머리를 닮아서 그래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방탄복 같은 밧데리 조끼를 걸치고 왼손에는 안전장갑 오른 손에는 전동가위를 들고 헐떡거리며 비탈을 올라가는데 여름촌댁 할머니가 중산골에서 내려오신다.(한비아빠~ 밭에 전지하러 가요?) (네~ 할머니~ 감나무가 순이 나오는데 많이 늦었어요. 나물 캐고 오시나 봐요?) (두릅 쪼매 꺾었제~) 할머니가 쪼매 꺾었다는 두릅 보따리를 보여 주시는데 쪼매가 아니다. 이만큼이 쪼매라 하면 지리산을 뒷동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산골짝에 두릅이 많이 피었으니 강 건너 마을 사람들 오기 전에 얼른 가보라는 여름촌댁 할머니 말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할머니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본 뒤 내 귀를 당겨 속삭이셨다.) 어렵게 빌린 전동가위로 예정된 작업을 할 것인지 아님 엄청난 농가 소득이 예상되는 두릅을 꺾으러 갈 것인지 한참을 망설였다. 오전에 비올 땐 하필이면 오늘 전동가위를 빌린 게 후회스러웠고, 오후에는 감나무 밭으로 가다 여름촌 댁 할머니를 만난 게 원망스런 하루였다.
(오늘 엄천골에 어떤 농부가 할 일을 재끼고 산에 두릅 꺾으러 갔다가 뒷북만 치고 내려왔다는데, 그가 누군지 밝힐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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