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태는 벼를 훑는 데 쓰던 농기구이다. 길고 두툼한 네 개의 나무를 서로 의지하게 세워 그 위에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틀을 얹었다. 벼이삭을 쇠의 갈라진 틈 사이에 넣고 잡아당기면 알갱이는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기에 홀태는 알곡을 알곡답게 만들어주는 기구인 셈이다. 지곡면 어느 마을에서 홀태를 만났다. 어릴 적 헛간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홀태와 똑 같았다.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저놈이 말이라도 할 수 있는 물건이었으면 옛 얘기라도 좀 해보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집에도 홀태가 있었다. 홀태의 자리는 늘 헛간의 컴컴한 구석이었다. 젊은 날 농부였던 내 아버지는 추석이 다가오면 그것을 마당에 세워놓았다. 정성들여 날을 다듬고, 두 손 가득 이삭을 쥐고 날과 날 사이에 집어넣었다. 벼이삭을 당기면 알곡이 사르락, 사르락 소리를 내며 밑으로 떨어졌다. 가을햇볕은 아버지의 정수리에서 쨍쨍 빛났으며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땀은 목 밑으로 흘렀다. 그 순간 마치 정물와의 한 장면처럼 홀태와 아버지는 하나였다.  아버지는 중년의 나이에 고향을 버렸다. 자식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였다. 농부는 산과 들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동차와 높은 빌딩을 바라보며 터 잃은 농부가 되어버렸다. 여섯 되는 자식을 알곡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매연 날리는 타지에서 도시인의 모습을 가장했다. 당신의 역할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삶은 항상 녹록하지가 않았다. 언제나 복병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기습적인 절망을 몰고 왔다. 사업을 하던 외삼촌은 야금야금 돈을 빌려갔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별일 없을 것이라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외삼촌은 어느 날 민들레 홀씨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삶의 길에서 만난 절벽이었다.술로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는 슬픈 고성방가를 지르며 애써 태연한 척 입술에 미소를 만들었다. 차마 흘러내리지 못하는 끈끈한 눈물을 속으로 꺼멓게 삭였다.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견골이 패일 듯 깊은 한숨으로 하얀 새벽을 맞이하고는 했다. 그러고 한없이 무디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위해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삶의 중력에 휘청 거릴 때마다 절망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고물고물했던 여섯 자식들을 알곡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세월은 아버지의 허리에 무게를 남겨 놓으며 흘렀다. 그 덕택으로 자식들은 나름대로 제 몫을 하는 알곡이 될 수 있었다. 칠순을 넘기며 까지 일을 놓지 않았던 당신은 팔순을 바라본다. 그 옛날 농부였던 아버지는 농사짓던 시절을 꿈꾸어 보지만 지금은 논도, 밭도 없다. 더 이상 목소리에 엄함도 묻히지 못했기에 자식들은 쉽게 당신의 말에 큰소리로 대꾸를 한다. 언제부터 자식들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옛 것은 자꾸 사라지고 잊혀 간다. 홀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농기구 중 하나였지만 오래전에 탈곡기와 콤바인에 의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늙은 아버지의 권위 또한 점점 설 곳을 잃어간다. 햅쌀로 지은 밥을 먹이기 위해 남보다 먼저 알곡을 준비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석양 속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노을을 헤치며 지게를 지고 걸어가던 농부의 뒷모습이 그리워진다. 그 모습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오래된 홀태에게서는 골동품에게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아버지의 삶도 그러하다. 삶이란 업적이 뛰어나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세상에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삶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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