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전 밥상엔 늘 간장종지가 올라왔다. 전이나 튀김이 없어도 간장종지는 늘 밥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밥상을 받으시면 바로 숟가락을 간장종지에 살짝 찍어 입으로 가져가신다. 아주 어렸을 때, 어른들의 행동을 무조건 따라 하던 그때 딱 한 번 따라 해봤지만 너무 짜서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던 그 일은 할아버지께는 밥상을 받으면 늘 하셨던 행사 같은 거였다. 간이 안 되거나 간이 싱거운 음식을 먹을 때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간장종지가 왜 날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밥상에 올라오는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아예 사라져 버린 추억의 간장종지가 되었다. 그 간장종지의 이름을 예전엔 지렁종지라 불렀다. 지렁종지는 예전의 우리 밥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전해오는 속담에 ‘사또밥상에 지렁종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장(醬)은 여전히 우리의 밥상에 여러 형태의 음식으로 올라오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지렁종지가 사라진 후로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나오는 장들에 밀려 우리의 전통장은 그 의미와 역할이 퇴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렁종지에 담긴 간장을 숟가락 뒤에 살짝 묻혀 입에 대면 짜지만 뒤에 오는 단 감칠맛이 입맛을 나게 해준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맛을 가진 간장이 담긴 지렁종지는 그들만의 전식(에피타이저)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부산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장 담그기 교육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교육 시작 전 거창이 고향이라는 김태수 소장님이 하셨던 인사말이 인상에 남아 몇 자 옮기려고 한다. 어린 시절 자란 거창의 마을에서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마을의 한 가장이 건넛마을의 예쁜 여자와 물레방앗간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면서 햇장맛 같다는 말을 건네는 것을 본처가 몰래 따라가 숨어서 들었다. 본처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 밥상을 차려 들어가서는 남편에게 지렁종지에 담긴 장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 가장은 장맛이 그냥 장맛이지란 대답을 하며 뭘 새삼스럽게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단다. 그러자 그 본처는 남편에게 어제 저녁에 먹은 장은 햇장이고 오늘 아침에 먹은 장은 묵은장이라고 하였단다. 늘 밥상에 간장 종지를 올리는 지혜로운 아내가 남편의 외도에 대한 일침을 가한 이야기로 들렸다. 햇장의 맛은 씨앗의 맛이고 묵은장의 맛은 본처의 맛으로 표현한 지아비도 재미나고 밥상을 차리면서 햇장과 묵은장을 이용해 지아비를 은근히 비난하면서 돌아오게 만드는 지어미의 슬기로움이 빛나는 이야기다. 추측컨대 아마도 지렁종지가 다시 밥상에 올라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녀세대가 집에서 담근 간장을 맨입에 넣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공부 잘 하라고, 좋은 학교 입학하라고, 좋은 직장 들어가라고...... 어머니들은 자녀를 위해 먹기 좋은 밥상을 쟁반에 차려 들고 자녀들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서 먹게 만드는 일이 계속되는 한 어른들과 함께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따위는 꿈을 꾸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선비 같던 농부 외할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으며 듣던 이야기들이 그리운 시간이다. 밥상머리 교육이 별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잊히지 않고 기억나는 할아버지의 어록들. “조금만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밥숟가락을 놓아라. 배가 부르면 생각이 둔해진다.”“아이를 가진 엄마는 뜨거운 물을 하수구나 길가 잡초에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거기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간장을 밥숟가락으로 찍어서 혀를 적시고 밥을 먹어라, 그러면 모든 음식이 맛있어진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