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밭에 첫서리가 내리면 무는 더 이상 밭에 있으면 안 된다. 농부는 무를 뽑아 땅을 파고 묻어두고 무청은 잘라 엮어 그늘에 걸어둔다. 무밭에 첫서리가 내리는 날 배추도 첫서리를 맞는다. 첫서리에 배추의 푸른 잎이 얼어 마음이 조급해지지만 배추가 아무리 불쌍해 보여도 이때 쫓기면서 서둘러 수확하면 안 된다는 것을 농부는 알고 있다. 서리를 서너 번쯤 맞고 배추 스스로 자신의 몸에서 수분을 빼고 체중을 조절한 후에라야 농부는 배추를 수확하고 김장준비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추에 너무 많은 수분이 김장을 한 후 물러지게 할 것이므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겨울은 춥다. 온 세상이 얼어붙는 시기라 동물은 동면에 들어가고 식물은 열매로 뿌리로 생명을 저장한 후 지상부가 말라 죽은 지 이미 오래다. 계절이 담긴 음식으로만 밥상을 차린다면 더 이상 푸른 채소가 있을 수 없는 때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대비해 담그는 김장에 모든 것이 담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배추와 무는 물론이고 파, 마늘, 갓, 고추 등과 사과, 배 같은 과일도 함께 들어있는 김치가 겨울의 밥상을 책임지고 있는 것일 게다.   겨울김장을 할 때 다른 집과 달리 우리 집에서는 늙은 호박을 이용해 김치를 하나 더 담근다. 황해도가 고향인 아버지가 원을 하셔서 담그기 시작했지만 이제 겨울에 호박김치가 없으면 내가 섭섭하고 아쉬워서 계속 담그고 있다. 이 호박김치는 담가서 생으로 먹는 다른 김치와는 다르게 푹 익힌 다음 들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지져서 먹는다. 어찌 생각하면 이 호박김치는 처음부터 김치로 먹지 않고 김치를 이용해 만들어 먹을 음식을 생각하고 담가두는 식재료로 분류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장을 하는 날 우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담그는 김치 중의 하나는 백김치다. 남쪽사람들이 말하는 싱건지와 비슷하기도 하고 배추동치미의 형태이기도 한 이 김치는 어느 해 우연히 탄생했고 나는 매년 이 김치를 담근다. 준비한 배추속이 모자라 소금에 절여져 남은 배추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대충 항아리에 담고 소금물을 부어둔 것이 이듬해 봄 식구들의 입맛에 불을 붙이게 된 까닭이다. 돼지고기 수육을 만들어 같이 먹으면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주니 좋고 먹을 반찬 마땅치 않은 날엔 고추장과 함께 싸는 쌈으로도 아주 훌륭하다. 보관만 잘 하면 여름 장마철에 떨어진 입맛도 이 김치 하나로 챙길 수 있다. 이 백김치에 적당한 배추는 좀 작아도 좋으나 살이 단단해서 물러지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 그런 까닭에 지리산의 북쪽에서 자라는 배추는 남쪽 지리산의 배추와는 달리 추위를 이기느라 잘 자라지는 못했지만 살이 단단해서 아주 좋다. 이 키 작은 배추는 스스로 단맛을 가졌기 때문에 음식을 할 때에 설탕과 같은 별도의 단맛을 내기 위한 인공감미료를 넣지 않아도 자연스런 단맛의 음식을 만들 수 있어서 좋다. 김장철이 끝나가고 있지만 혹 남은 배추가 있다면 절인배추에 쪽파, 대파, 편으로 썬 마늘만으로 담그는 백김치 한 통 담가보시라 권하고 싶다. 그리고 구정에 기름진 음식으로 지칠 무렵 이 김치도 익을 것이니 한 포기 꺼내 배추의 길이로 길게 쭉쭉 찢어 먹으면 그 싱싱하고 깔끔한 김치의 맛이 며칠간의 기름진 음식의 잔재를 말끔히 지울 것이다. 그리고 과하지 않은 양념으로 익은 김치의 자연스런 배추의 맛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남은 배추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배추를 사다가 담글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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