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 국내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다 순국한 경남 합천출신 신상호 성만석 이두익 의병장 등 28명이 한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순국 106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20일 경남 하동문화원 정재상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지난 2월 토지주택 박물관과 국가기록원에서 항일의병장 등 259명의 문건을 찾아 의병장 41명의 공적서를 만들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는데 이중 28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장을 추서 받았다”고 밝혔다. 이번에 정위원장의 노력으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항일의병장 28명은 경남 12명, 경북 5명, 전남 6명, 전북 3명, 강원도출신 2명이다. 이들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07~1909년 사이, 50~400여명의 의병대를 조직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 일대인 지리산 가야산 태백산맥에서 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일제의 ‘남한 대 토벌작전’때 체포되어 학살 당하거나 전사 순국했다. 한편 문건을 찾아 공적서를 만들어 서훈을 신청했던 정재상 위원장은 “항일의병들은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목숨을 바친분이다”며 “이번 훈장추서는 항일투사들의 민족애와 나라사랑 정신의 숭고한 뜻을 다시 한번 생각 하게한다”고 밝혔다. 정위원장은 “정부는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보훈사업을 펼쳐야한다”고 덧붙혔다. 이번에 훈장이 추서된  경남지역 항일의병장의 공적요지는 다음과 같다. <합천출신> ▲신상호(申相鎬·36세, 1872~1908 8 31·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합천군 가야산 일대와 산청군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31일 합천군 삼가 평구(平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휘하 의병 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신상호 의병장만 칼로 잔인하게 찔러 죽였다.▲성만석(成萬石~1908 8 3·경남 합천군 삼가면 목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황매산일대인 삼가군, 합천군 등지에서 의병 7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3일 삼가군 서북 35리 부근인 목동(木洞) 서남 5리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였으나 성만석을 비롯 5명이 전사했다.▲이두익(李斗益~1908 5 20·경남 합천(삼가)군 모고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남 합천, 삼가, 거창 등지에서 의병1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는 특히 손태주(孫太朱·마산), 이준명(李俊明·성주), 영기선(榮基善·영산)등 의병 수십명과 함께 1908년 4월8일 합천 우체국을 공격했다. 그러던 중 5월20일 삼가군 모고면(毛古面)에서 체포되어 총살됐다. <함양출신>▲김홍대(金弘大~1907 10 28·일명 김창석․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함양, 산청, 남원, 무주, 장수 등지에서 의병 100여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12일과 13일 함양남방 약 50리 지점인 마천면 추성(楸城)에서 의병 60여명을 지휘하며 격전을 벌였으나 의병10명이 전사 했다. 이후 김홍대는 10월28일 오전6시 함양군 북방 약 150리 부근 대곡동(大谷洞)에서 체포되어 총살됐다.▲이안옥(李安玉~1908 8 31·경남함양군 휴천면 목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함양, 산청, 진주등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8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31일 함양군 동남쪽 15리 목동(木洞)부근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체포되어 산청군 서방 약 40리 오봉산(五峯山)에서 총살됐다.그리고 동지 2명은 9월 2일  함양군 추성(楸城) 남방 40리에서 총살당했다.▲김순오(金順吾~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지리산일대인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일대에서 수십명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15일 김찬언(金贊彦)등과 함께 함양군 일대에서 격문을 돌리다 체포되어 총살됐다.▲김찬언(金贊彦~1908 9 15·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지리산 일대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촌(倉村)에서 마을 동장(洞長)을 하면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8년 9월15일 같은 마을 김순오(金順吾)와 함께 격문을 돌리다 체포되어 두명이 함께 총살됐다. <밀양출신>▲백운하(白雲下~1908 8 21·경남 밀양 무안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경상남도 밀양과 경북 청도를 중심으로 의병6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8년 8월 21일 밀양군 무안동(密陽郡 武安洞) 부근에서 의병6명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었다. 이날 백운하 의병장을 비롯한 7명이 총살됐다. <거창출신>▲김진규(金振奎~1908 4 25·경남 거창군 가북면 심방)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이후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인 거창에서 유종환(兪宗煥)의병장의 부장(副將)으로 활동하며 거창인동, 신방, 도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4월25일 유종환, 김진규등 의병24명이 거창군 인동(거창 동북 약30리)에서 숙영했다. 이후 이들은 거창 동북방 약45리 심방(尋芳)에서 일본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다 김진규를 비롯한 의병9명이 전사하고 유종환등 4명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의령출신>▲문봉래(文奉來~1908 6 7·경남 의령군 가례면 갑을동)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의병150여명을 지휘하며 경남 의령, 창녕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08년 6월6일 의령북방 약30리 부근 갑을동(甲乙洞)에서 문봉래가 지휘하는 의병50명이 주둔했다.이후 문봉래의진은 6월7일 갑을동 부근 양성동(陽成洞)학교에서 숙영 중 새벽2시에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문봉래를 비롯한 의병12명이 전사했다. <하동출신>▲정승유(鄭勝有~1908 12 15·경남 하동군 진교면)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박매지등과 함께 하동, 산청, 진주 등지에서 의병300여명을 규합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던 중 정승유는 1908년 7월 중순 하동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어 하동경찰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수감되어 있던 박인환(박매지) 권석도 등과 함께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그는 이후 계속 항일투쟁을 벌이다 12월15일 하동진교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압송되던 중 하동군 양보면 봉곡촌(鳳谷村)에서 동지 2명과 함께 총살됐다.▲이덕길(李德吉~1909 3 21·경남 하동군 악양면) 의병장은 구한말 한병 상등병(군인) 출신으로 을사늑약(1905년) 이후 1907년 부터 지리산 일대인 하동 산청 함양 진주 구례 곡성 광양등지에서 이학로, 박매지, 황낙현, 노성화, 최경순, 우수보, 권석도, 전재수, 심상근, 이춘이, 김채홍, 송명운등과 함께 의병3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에 맞서 결사 항전했다. 그는 특히 의병대의 훈련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14일 산청군 백곡면(栢谷面) 신대리(新垈里)에서 일본군 매계(梅溪)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3월21일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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