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봄, 춘천에 사시는 큰 이모부께서 놀러오면서 우렁이를 한 바가지 잡아오신 적이 있었다. 손질해본 적이 없어서 좀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나는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잡은 보말을 삶아서 먹던 것과 비슷할 거라 여기고 대뜸 씻어 건져 솥에 넣고 삶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우렁이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일과 만나게 되었다. 바늘로 삶아놓은 우렁이의 살을 꺼내보니 그 안에 모양을 갖춘 수수알 만한 새끼우렁이들이 오글오글 들어있었다. 뭔가 하면 안 되는 일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한 동안 나를 지배하면서 괴롭힌 일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렁이를 멀리하는 것은 아니니 내 스스로 얄팍한 나의 밑바닥을 보게 되는 한 예가 된 사건이기는 하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어설프게도 다만 우렁이를 넣은 강된장의 맛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까닭에서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된다.
된장을 이용한 모든 음식은 늘 먹어도 질리지 않고 일정 기간 먹지 않으면 강렬한 그리움의 맛으로 변하여 사람을 괴롭힌다. 더구나 쫄깃한 식감으로 입안을 즐겁게 하는 우렁이를 넣은 강된장은 말로 그 맛을 다 표현하기 어렵다. 밥에 한 숟가락 떠 넣고 쓱쓱 비벼먹는 맛이 일품이라 밥 한 그릇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우렁이 하나씩을 건져 얹은 쌈을 싸도 밥도둑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공기 좋고 경관이 좋은 한적한 시골의 마당의 평상에라도 앉아 먹을라치면 운치까지 있어 더욱 그렇다.
오래된 문헌에 의하면 18세기 조선의 한 선비는 우렁이를 먹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가 경험했던 그대로 어미를 죽이고 세상에 나오는 우렁이의 생태적 특성 때문이라 했다. 서식환경이 나빠지면 자신의 살을 먹여서 새끼를 키우다가 새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어미는 살이 모두 없어져서 껍데기만 물에 둥둥 뜬다. 희생하는 어머니의 상징 같은 생물이 우렁이라 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는 우렁이가 인체에 남아있는 열독(熱毒)을 제거하고 갈증을 멈추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부은 것을 가라앉히며 대소변을 잘 나가게 하여 배 속에 열이 몰리는 것을 없앤다고 기록하고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황달에 좋다고 하시면서 영양실조로 눈이 노래지던 동생에게 논에서 잡은 우렁이를 삶아 먹이기도 하셨다. 중국의 <본초강목>에는 황달과 숙취에 좋으며 매일 끓여서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할머니의 처방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며 특히 술 먹은 다음날 숙취를 없애는데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농약을 치지 않는 논에서 자생하는 흔한 우렁이라 우렁이를 예사롭게 생각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우렁각시에 관한 옛이야기가 있는 것만 보아도 우렁이와 우리 생활사의 밀접함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우렁이는 그냥 우렁이 아니라 뭔가 선물 같은 일이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일어났을 때 우렁각시가 다녀갔나 하는 이야기를 할 만큼 특별한 것이기도 하다.
자잘하고 소소한 추억이 담긴 논우렁이를 무주의 중산마을에 갔다가 만났다. 한편 반갑기도 하고 한편 옛날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 한쪽이 무겁기도 하지만 덥고 지루하게 비 오는 날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같은 때, 논우렁이를 넣고 끓인 강된장 한 술에 열무김치를 넣고 비비는 보리밥은 참으로 맛나므로 꽤 큰 유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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