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中國古典의 精髓(중국고전의 정수) 金言寶典(금언보전) 修學人 李寅鎬 編譯(수학인 이인호 편역) 함양출신 수학인(修學人) 고 이인호 선생 편역 (金言寶典) 출간 금언보전 이제 고인이 된 함양출신 남송(南松) 이인호(李寅鎬) 선생이 40여년에 걸친 평생 동안의 일과로 틈틈이 편역한 금언보전(金言寶典)을 소개한다. 이 책은 성현들의 금옥같은 말씀을 요약 해설하여 집대성한 책으로 현대인들이 알아보기 쉽게 간추려 우리들에게 교훈과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저자는 언제나 마음속에 모자람으로 가득 차 있는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인 수학인(修學人)이라는 말을 이름 앞에 늘 붙였다. 남송(南松) 고 이인호(李寅鎬)선생의 가계 고인은 경남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의 가난한 선비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합천 이씨(陜川李氏) 시조 강양군(江陽君) 휘 개(開)의 35세손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휘 경분(景芬)의 25세손이며 문과부호군(文科副護軍)으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휘 계통(季通)의 17세손(世孫)이다. 그의 16대조고 참봉공 휘 승문 이하 15대 조고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 퇴계 이황 양 선생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영역을 넓힌 대 유학자이신 청향당 징사(徵士) 이원(李源)선생 이시고 또한 한말의 독립운동가 이자 유학자이신 진암 이병헌(李炳憲) 선생과 조계종 대종사 성철(聖哲) 스님 등을 배출한 유학자 가문이다. 남송의 부친의 자는 덕명이요 초명은 상수(후일 재상:在祥)이신데 7세의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움 속에서 성장 하면서도 마음씨가 곱고 효성이 지극하여 이름 높은 효자로 인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러한 부친의 효심은 입소문을 타고 흘러 당시 병곡면장이었던 명문가 성주이씨 이교채(李敎彩)씨 가문에서 청혼하여. 당시 병곡면장의 넷째 따님이었던 이무연과 결혼하게 되었다. 또한 부친께서는 늘 자기가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해방이 될 무렵 많은 젊은이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마을의 원로들과 상의하여 어렵사리 마련한 자기의 땅(현재 송평마을 회관)과 애지중지 하며 밭갈이 하던 황소를 팔아 동민들과 합심하여 집 앞에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인품 높은 선생님을 모셔다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게 되자. 이 학교를 거쳐 간 사람들 중에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은 분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주민일동은 현 송평마을회관 옆에 공적비를 세우고 부친의 공적을 치하 드리고 있다) 이러한 부친의 마음속에는 항상 나는 못 배웠지만 자식만은 훌륭히 키워 야겠다는 마음으로. 남송(南松)이 5살이 되자 마을의 서당에 보내게 되었는데 한자를 익히면 능히 열자를 아는 지라 서당의 훈장도 가히 혀를 내 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모친은 친정 조부께서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글을 가르쳐 주지 않자 새벽으로 가마솥에 불을 지피면서 남동생의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귀울여 천자문과 사자소학 등을 줄줄 외었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물려받은 남송(南松)의 재주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남송(南松) 이인호(李寅鎬)의 학교생활 당시 고인은 마을 가까이 있는 병곡초등학교(병곡공립소학교)에 수월하게 다닐 수 있었지만. 이십리 길이 넘는 함양중학교와 함양농업고등학교(현 제일고등학교)를 통학하는 피곤함 속에서도 모든 학년에서 1. 2등을 다투었다고 한다. 그의 모친께서는 남송(南松)의 학교 성적표를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 까지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는데 우등상이 없는 해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남송(南松)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에 그의 집 사랑방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쳤었는데 당시 마을의 일꾼들보다 많은 하루에 9장의 가마니를 쳐서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이거나 공부거나 항상 남들보다 앞섰으며 사랑방의 일꾼들이 돌아간 후에도 그의 방엔 호롱불이 꺼지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걱정되어 “얘야 그만 자거라” 하면 “예”하고 대답은 하였으나 언제나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가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라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었는데 남송(南松)은 공부도 잘 하고 목소리가 우렁차서 학도호국단 대대부관의 역할을 맡았다. 그의 탁월한 통솔력과 지휘력도 이때부터 길러진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던 그가 함양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고 보니 함양에서는 용이 났다고들 하면서 모두들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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