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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과 금계동(金鷄洞) 小考(소고) 3편
주간함양 기자 / news-hy@hanmail.net입력 : 2020년 11월 02일(월) 12:20
■의탄리(義灘里)

- 중말(義中) 마을 유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이다. 가락국의 구형왕이 추성동 국골에 은거하면서 이곳에서 참나무 숯을 굽었다고 하며 인근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양왕의 능 돌무덤이 있다. 마을 안에는 8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어 매년 음력 7월 7일에는 당산제를 모시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관찰사 김수의 장계를 선조 임금께 전한 박사신 수문장이 되었으며 인조 때는 충신으로 그 후 선비와 효자로 명성을 얻은 함양박씨가 선조 때부터 집성촌을 이루었고 경주정씨가 남원에서 정조 때는 경주이씨가 산청에서 정착하였다.

- 평정 말(義坪) 마을 유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이다. 고려 시대엔 의탄소(義灘所)가 있었던 지역으로 당시 숯을 굽고 목기를 생산하여 나라에 공급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는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언급이 되어 있다. 추성동 칠선계곡 입구에 있다.
하동에는 소금 장수가 벽소령과 오도재를 넘어 함양에 왔다가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서 장을 보게 하였다고 하여 새 장터란 그곳도 있고 마을 앞에는 사장 터(활터)도 있었다. 음력 정월 초삼일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비는 당산제(평화제)를 지내왔다. 조선 선조 때 함양박씨와 수원백씨 경주정씨가 입촌했고 정조 때 경주이씨가 현종 때 의령여씨가 정착했다.

- 노디목(金鷄) 마을 유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이다. 냇물을 건너다니는 징검다리 노디의 목이라는 뜻에서 노디목 이라 했다. 정감록에 나오는 금대산 밑에 금계동이고 이곳이 지리산 피난지라고 하였다. 금계동 입구에 방장산 제1문(方丈山 第 一門)이란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으나 태풍 루사로 인하여 지금은 콘크리트로 만든 문 위에 적혀있다.
의탄리는 의중. 의평, 금계동 마을이 있다. 임천강을 중심으로 한 3개 마을은 의중 경주이씨의 유적이 많다. 죽포, 탄수, 은계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 6·25동란에 거치면서 마천의 생생한 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탄수 선생님의 방장제일문은 지리산 관문인 칠선계곡 입구에 천왕봉을 바라보는 금계동 입구에 있다. 금계마을은 현재 7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탄수 선생님의 예언대로 이곳은 6·25동란 전에는 마을이 형성되지 아니하였으나 이후에 번창하게 되었다.
의탄리는 지리산 둘레길 3구간에 위치해 있다. 탄수대의 방장제일문, 우락대, 구암대, 덕암과 성혈 등의 석각이 둘레길 바로 주변에 있지만 안내판조차 설치되어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탄수대 방장제일문에 진입로와 안내판을 설치하고, 성교대(약작 통나무 다리)를 복원한다면 마천면은 물론 의탄리 금계마을의 지리산 둘레길에 새로운 명소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의중마을에 살았던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과 장자 이종순(李鐘純 1866~1913) 공이 정미(1907년) 의병장 석상용 의진에 총과 군자금을 지원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미발굴된 이야기이다. 탄수(灘叟) 이종식(1871~1945)공이 죽음을 무릅쓰고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을 찾아가 자신이 인질로 잡히고 장형(長兄)을 구명하였다는 스토리는 미담을 넘어 너무나 극적인 이야기이다. 지금이라도 의중과 금계마을에 살았던 죽포공 문중의 독립운동 사료를 발굴하여 현장(顯章)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죽포 이규현공의 장손자 은계 이진우(李璡雨, 1897~1954)공은 1922년 벽송사 승려들과 마암에 마암당을 건축하였다. 함양 명승고적 보존회(군수 민인호)에서 주관하여 천왕봉을 오르는 길목에 지리산의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을 건축한 것이다.[함양군수 민인호의 지리산지와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 (1923년 4월 1일)] 진시황이 보낸 한종과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러 방장산에 왔었다는 내용이다.

■지리산보(智異山譜)

智異山(지리산)은 本道西境(본도서경)에 盤礡(반박)한 巨山(거산)이니 白頭山(백두산)의 支脉(지맥)이 南流(남류)하야 此山(차산)이 됨으로 一名(일명)은 頭流山(두류산)이라 칭하고 又(우)별명은 方丈(방장)이니 古書(고서)에 云(운)한 바 方丈(방장)은 帶方대방(南原郡(남원군) 南(남)에 在(재)하다 함이 즉 是ㅡ다(杜甫詩(두보시)에 方丈三韓外(방장삼한외)라는 句(구)가 有(유)한데 其註(기주)에 方丈(방장)은 帶方國(대방국) 南(남)에 在(재)한다 云(운)함). 往昔(왕석) 新羅(신라)의 時(시)로부터 中國(중국) 五嶽(오악)의 一(일)인 衡山(형산)에 비하야 南嶽(남악)이라 칭하고 李朝(이조)에 至(지)하기까지 국가에서 秩禮(질례)(山祭名산제명)를 행한 고로 慕華主義(모화주의)에 중독된 俗儒輩(속유배)들은 朝鮮(조선)을 小中華(소중화)라 칭하덧이 智異山(지리산)을 小衡山(소형산)이라 칭하기도 하고 又(우) 或說(혹설)에 智異山(지리산)은 關東(관동)의 金剛山금강산(蓬萊봉래)과 湖南(호남)의 漢拏山(한라산)(濟州제주)과 共(공)히 고대부터 三神山(삼신산)이라 칭함으로 支那(지나)의 秦始皇帝(진시황제)가 方土徐市(방토서시)로 童男童女(동남동녀)를 率(솔)하고 海(해)에 入(입)하야 不死樂(불사악)을 구할새 徐(서)가 此山(차산)에 入(입)하얏다가 南海錦山(남해금산)을 經(경)하야 日本(일본)으로 往(왕)한 故(고)로 錦山海岸絶壁(금산해안절벽)에 徐市過此 四字(서시과차 사자)가 今(금)에도 尙在(상재)하다 한다.

■지리산탐승안내(智異山探勝案內)

- 함양명승고적보존회장 민린호
(咸陽名勝古蹟保存會長 閔麟鎬)


智異山(지리산)은 朝鮮(조선)의 有名(유명)한 巨嶽巨(거악)인데 關東(관동)의 金剛山(금강산)과 湖南(호남)의 漢拏山(한라산)으로 共(공)히 三神山(삼신산)의 名號(명호)를 得(득)하니 白頭山(백두산)의 淸淑(청숙)한 氣(기)가 南流(남류)하야 此山(차산)이 됨으로 頭流山(두류산)이라 칭하고 又(우) 竺書(축서)에 方丈毗盧(방장비로)가 有(유)함으로 方丈山(방장산)이라. 仙書(선서)에 方壺員嶠(방호원교)가 有(유)함으므로 方壺山(방호산)이라고도 稱(칭)하니이라. 邃古時代(수고시대)에 上帝(상제)께오서 三神山(삼신산)이 海上(해상)에 浮在(부재)하야 隨波上下(수파상하)함으로 西海(서해)로 流去(류거)할가 恐(공)하야 策疆(책강)을 遣(견)하야 十五巨鰲(십오거오)로 하야곰 三神山(삼신산)을 頭戴(두대)케 함에 於是(어시)에 三神山(삼신산)이 峙立不動(치립불동)한지라. 

支那秦始皇時代(지나 진시황 시대)에 方士韓終徐福(방사한종서복)을 遣(견)하야 三神山不死藥(삼신산부사약)을 求(구)하랴 하얏는데 韓徐(한서)가 此山(차산)을 經由(경유)하야 南海錦山(남해금산)을 過(과)하야 日本(일본)에 入(입)하야 仍(잉)히 土着(토착)의 氓(맹)이 되얏나니 今(금) 日本(일본)에 徐市서시(即徐福즉서복) 村(촌)이 有(유)함은 實(실)로 此時代(차시대)의 事(사)이라.

- 함양명승고적보존회장 민인호
(咸陽名勝古蹟保存會長 閔麟鎬)


지리산은 조선의 유명한 거악인데 관동의 금강산, 호남의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백두산의 맑고 깨끗한 기(氣)가 남쪽으로 흘러 이 산이 되었으므로 두류산이라 칭하였고, 또 불경에 방장․비로(方丈毗盧)가 있으므로 방장산이라 하였고, 선서(仙書 *선도에 관한 책)에 방호․원교(*발해 동쪽 귀허(歸墟)에 있다는 5개의 산. 대여 원교 방호 영주 봉래《列子)가 있으므로 방호산(方壺山)이라고도 칭한다. 먼 옛날 상제(上帝)께서 삼신산이 해상에 떠 있어 물결 따라 오르내리므로 서해로 떠내려갈까 걱정하여 책강(策疆 *禺彊(우강)바다와 바람의 신)을 보내 열다섯 마리의 큰 자라로 하여금 삼신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함으로써 이에 삼신산이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중국 진시황 시대에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한종․서복을 보내 삼신산불사약을 구해오라고 하였는데 한․서가 이 산을 경유하여 남해 금산을 지나 일본에 들어가 그로 인해 토착민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에 서불(徐市 즉 徐福)촌이 있음은 실로 이 시대부터의 일이었다.

이진우 공은 마천초등학교를 설립(1933년)하는데 학교 설립기금 萬金(만금)을 쾌척한 향토교육가이다. 또한 6.25 동란 이후 전란 극복을 위해 천석의 재산이 바닥이 날 정도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 자선사업가이다.
황량한 도계공원에 면민이 세운 송덕비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헌신, 무지에 대한 교육의 열망,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에 대한 積善(적선)은 함양 역사문화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다른 지자체에서는 가공인물과 없는 전설도 억지로 끌어당겨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 변강쇠 옹녀의 황당한 이야기보다, 칠흑 같은 일제 강점기와 전란의 시기에 의중마을과 금계마을에 살았던, 경주이씨 문중의 죽포공과 탄수공, 은계공 3대가 민초들을 위한 나눔의 이야기를,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자세하게 기록하여 세인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 탄수공의 생몰 연대는 경주이씨세보의 기록을 따랐습니다.
문호성 함양군 서복연구회 회장

↑↑ 덕암
ⓒ 함양뉴스
마천면 의탄리 새별들 덕암(德巖) 성혈(性穴, cup-mark)


덕암(德巖)은 마천면 의탄리 새별들에 있다. 마을 사람들이 덤바우라고 부른다. 전라도 사투리로 큰 바위라는 의미이다. 이곳에 의중 마을에 살았던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 선생이 ‘德巖덕암’ 석각을 새겨 놓았다. 마애 석각 왼쪽으로 李璡雨(이진우)와 李輔雨(이보우)의 인명이 보인다. 덕암에는 15~20개의 성혈이 있다.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마천석 단단한 암질에 새겨진 여러 개의 바위 구멍이 뚜렷하다. 의탄리 새별들의 성혈은 지리산 둘레산길 3구간 바로 인근에 있어 둘레산길 탐방객들에게 안내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성혈을 검색해보니 대강 네 가지로 압축된다.
1. 남녀의 성적(性的) 교합과 비슷한 행위를 통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祈子信仰)의 한 형태
2. 농경사회에서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기를 천신에게 비는 신성한 장소로 마을의 상징적 경관에 위치함.
3. 선사 시대의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
4. 선사시대부터 청동시대는 물론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
↑↑ 성혈
ⓒ 함양뉴스
성혈(星穴)의 연구는 암각화 연구에 포함 부수적인 분야로 생각하여 자체 연구는 드물다고 한다. 미개척 분야임에도 대전문화유산울림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느낌표(이창남)님은 ‘바위 구멍 여행(이창남 저, 2014년)’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느낌표님에게 자문을 구하니 ‘별자리’라는 의견을 보내왔다. 성혈(星穴)은 전국의 산야와 강가에 널리 산재해 있다고 한다. 참고로 ‘바위 구멍 여행’을 검색하면 느낌표님의 자료를 읽을 수 있다.
역학에 밝으신 임재욱 선생은 덕암 성혈을 자미원(紫微垣)의 별자리로 설명하였다. 추성(楸城)의 유래도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인 추성(樞星)에서 유래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북두칠성과 칠성동, 칠선은 하나의 카테고리이다.’ ‘칠선(七仙)은 일곱 선신(仙神)이지 선녀(仙女)가 아닌 듯하다’라고 단번에 읽어냈다. 이 의견은 조용한 박사의 생각과도 상통(相通)한다. ‘방장제일문은 추성(七星)이 조림하는 불노장생 선계(仙界)로 들어가는 카디널 게이트이다’ ‘추성(楸城)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추성(樞星)에서 온 지명이다’ ‘성교(星橋䑓)는 오작교(烏鵲橋)이다’라고 하는데... 정작 나는 장님이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지면서 칠성동으로 가는 형국이다.
※ 자미원(紫微垣) - 별자리 이름. 고대의 별자리는 28수(宿) 외에 삼원(三垣)으로도 구분했다. 즉 자미원(紫微垣)·태미원(太微垣)·천시원(天市垣)이다. 자미원이란 황하 유역 북쪽 하늘의 북극성을 기준으로 그 주위에 운집해 있는 성운(星雲) 집단을 말한다. [다음 백과사전]

성혈(性穴, cup-mark)이란?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컵 모양 혹은 원추형의 홈이다. 민속에서는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혈은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이라고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 알 바위나 알 구멍이라 부르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혈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이다. 성혈(性穴)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목한 홈을 여성의 성기(性器)로 여기며, 이것을 여성의 생산성에 비유한 의례 행위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즉 오목한 홈을 만들고 다른 도구로 구멍 속을 비비면서 마찰하는, 남녀의 성적(性的) 교합과 비슷한 행위를 통해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모방 주술(模倣呪術)의(模倣呪術) 일종이며 민간신앙(祈子信仰)의 한 형태이다.
고인돌을 민간에서는 칠성 바위라고 하듯이 고인돌 상석에 성혈이 새겨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암각화에 마제 석검이나 이형 청동기가 새겨진 예가 흔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암각화는 주로 청동기 시대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각화나 지석묘 상석에 새겨진 성혈은 보통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기를 천신에게 비는 장소에 새겨졌을 것이다. 성혈은 농경사회에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유적의 입지도 마을의 상징적 경관에 위치함으로써 그 자체가 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관련된 의례가 성스러운 행위로써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주간함양 기자  news-h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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