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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이 명장이 아닌 이유 2
박진호 학생기자(함양중학교 2학년)
주간함양 기자 / news-hy@hanmail.net입력 : 2019년 09월 30일(월) 13:34
↑↑ 박진호
ⓒ 주간함양
이렇게 온갖 삽질을 반복하며 조선 수군을 병들게 만들던 원균은,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찍이 이순신 제독을 모함하며 그가 했던 말이 자신은 이순신과 달리 부산진으로 곧바로 출격해서 왜군들을 격퇴시키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말하고 실제로 통제사에 부임해서 상황을 보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말을 180도 바꾸어서 출격 명령을 거부했다.
이순신 제독을 쫓아내고 자기가 통제사가 되려고 온갖 비리에 로비, 허풍은 있는 대로 다 떨었으니 비현실적인 주장이 나오는 것이 예정된 일이었다.
결국 원균의 이런 되도 않는 수작질에 화난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치며 호통쳤고, 원균은 돌아와서 무작정 출격했다가 별 소득도 못 얻고 돌아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전설(?)이 시작된다.
본 전투 전에 연표 형식으로 가볍게 그의 화려한 전적을 보자.
1597년 6월 18일. 왜군과 안골포에서 교전, 적선 두 척을 빼앗았으나 보성 군수 안흥국이 전사하고, 격렬한 저항에 후퇴함.
1597년 7월 7일. 부산포 근처 다대포에 상륙.
1597년 7월 8일. 왜군과 교전하여, 빈 배 8척을 격침.
1597년 7월 9일. 왜군이 공격해오자 쫄아서 도망치다가 판옥선 20여척을 상실. 임진왜란 사상 최초로 판옥선이 격침당함.
1597년 7월 14일. 부산포에서 무력 시위 도중 일본군 수송선을 발견, 무작정 뒤쫓다가 판옥선 12척이 해류에 떠내려가버림. 5척은 도모포에, 7척은 서생포에 표류했고 서생포에 표류한 병력은 모두 전멸함.
원균은 이 출전으로 왜선 10척을 부수고 조선 배 32척을 잃는, (이순신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교환비로 교전한 뒤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전까지 원균은 전투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당연한게 전투야 많았지만 죄다 도망치거나 이순신이 다 해 주었으니까.) 이 전투에서 원균이 처음 보여준 능력은 향후 최악의 패전을 보여주는 복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때가 조선 수군이 그나마 온전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절정: 칠천량의 중심에서 후퇴를 외치다.
이렇게 병력을 찔끔찔끔 잃어가자 의욕을 상실한 원균은 7월 15일까지 칠천량에서 술만 퍼마실 뿐 출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발견한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온 수군을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또한 육군을 가지고 칠천량으로 향했다.
7월 15일, 조선 수군의 배에 불이 났는데, 이것은 왜군의 기습 공격이었고 당연하게도 원균이 대장이니 뭐 할 틈도 없이 불난 배들은 다 타버렸다.
군량선에 불이 붙은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7월 16일 새벽 4시.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향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지휘부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료>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 10여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척 ~ 6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 쌌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이미 복병선은 적에게 불태워 없어졌다. 균이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여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난중잡록》

이 말인즉슨, 일본군이 조선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도 모르는 지경이었다는 소리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냐면 군대에서 초병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게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때 기습한 배는 단 두 척이었으나 원균은 또 쫄아서 후퇴했고, 후퇴마저도 제대로 안되서 한산도가 아닌 춘원포(지금의 고성)쪽으로 후퇴했고, 여긴 막다른 곳이었고, 더욱이 이곳에 오자마자 원균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갈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춘원포의 조선군은 전멸하였다. 춘원포에 온 시점에는, 도도 다카도라의 배 50여척이 집결한 때였으나, 그래도 여전히 조선 수군의 배와 병력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이순신 제독이 6년 동안 뼈 빠지게 육성한 최정예 조선 수군은 아무것도 못해보고 전멸하였다. 그래도 다행히, 전투 중반부부터는 안되겠다 싶은 장수들이 독자적으로 후퇴하여 80여척 정도의 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국 원균 말을 들은 사람은 죽고, 말 안 듣고 후퇴한 사람은 살았다.

역사 왜곡- 원균옹호론(feat. 원주 X씨, 평X시.)
그런데 이런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웃긴 건 사회 전반적으로 이 주장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여X시의 이순신 광장에는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인물의 소개를 비석에 새겼는데, 이 중 원균이 있다.
또한 평X시는 아예 시 전체적으로 원균을 위인으로 추겨세우고, 원균을 용맹한 명장으로 묘사하고 있을뿐더러, 원균의 수많은 뻘짓을 조선 조정과 권율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 원균 기념관까지 세우며 아주 작정하고 역사 왜곡을 시전하고 있다. (이런 짓 안 해도 되는 게, 당장에 원균의 동생인 원연부터가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진정한 의미의 위인이다.)
그리고 이 평X시를 연고로 하는 원주 X씨 종가에서는 원균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며, 성현이자 유종같은 존재로 모시는데, 정말 이순신 제독님이 하늘에서 보시면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의 자손들에게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물려줄 생각이 아니라면, 원균옹호론이나 위인 추대 따위는 그만두는 게 상책이다.
주간함양 기자  news-h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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